나석주(羅錫疇) 열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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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나석주(羅錫疇) 열사
1890년~1926.12.28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나석주 열사는 일제의 착취간성인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폭탄을 투척,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인물. 열사의 당시 의거는 일제식민통치가 경제수탈에 집중될 때 발생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선생의 의거는 의열투쟁이라는 단순한 사건 차원을 넘어, 당시 민족운동으로 승화된 농민․노동운동 차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난 62년 3.1절에 역사적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져간 열사의 생을 되새긴다.

1890년. 황해도 재녕군 북률면 진초리
이곳은 당시 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서북지방 책임자인 백범 김구(白凡金九) 설립한 양산(楊山)학교가 있었다.
백범과 나열사의 운명적인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 나병헌(羅秉獻)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의 외아들 석주(錫疇)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소년 석주는 양산학교를 거치며, 몸과 마음이 굳센 독립투사로 다져진다.

황해도 재녕(載寧) 출생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이 지방까지 번지면서부터 청년이 된 석주는「고기가 물을 만난」듯,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3월 하순, 어느날. 사리원 부호 초병항(崔秉恒)의 집에 6인조 권총강도단이 들었다. 이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강도들은 답지않게 모두 최부자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최부자도 그제서야 좌정을 하고 냉정을 찾았다. 그때 한 복면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일반강도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군자금(軍資金)을 마련하러 온 젊은이들입니다.』
말뜻을 알아차린 최부자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오히려 6인조 강도들이 불안한 눈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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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