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李儁) 열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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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입니다.
一醒 이준(李儁) 열사
1859. 1. 21~1907. 7. 14

․1896. 독립협회 평의원
․1904. 공진회 회장
․1906. 비밀결사 「신민회」조직
․1907. 7. 헤이그 순국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一醒의遺訓중에서 -

한남 출신으로 일찍이 상경하여 최익현 선생으로부터 재사로 일정받다.

1859년 1월 21일 함남 북청군(北靑郡) 속후면(俗厚面) 용전리(龍田里:舊中山里) 발영동(發英洞)에서 대 학자인 부친 이병관(李秉瓘) 공과 모친 청주(淸州)이(李)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초명(初名)은 성재(性在)․여천(汝天)․준재이였으며 자(子)는 순칠(舜七),호(號)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등이 있다.
열사가 세 살되던 해인 1861년 7월 아버지가 별세한 후 이어 어머니 마저 돌아가 졸지에 고아가 되었으나, 당대 대 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李命燮)과 숙부 이병하(李秉夏)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875년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형조판서인 김병시(金炳始)․최익현(崔益鉉) 선생 등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한국 최초의 법관이 되어 부정부패, 비리척결에 앞장서다

1879년 일제가 함경도 원산진(元山津)의 개항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수관(講修官)인 홍유길(洪裕吉)을 만나 개항불가의 이유를 설파하여 일제에게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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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자료, 정부자료
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