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이상재(李商在)선생은 1896년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YMCA교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한 민족교육운동을 펴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회장에 취임, 민족지도자로 활동하다.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월남(月南)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독립협회․신간회 창립…민족운동주도
월남 이상재(月南李商在).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역사의 분수령에서 그처럼 올곧고 굵은 선을 그어놓은 선각자는 흔치 않다. 월남(月南)은 역사가 인물을 만든 경우가 아니라 인물이 역사를 창조한 경우에 해당한다.
교육자․민권운동가․정치가․청년운동가․언론인 등등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많다. 그러나 사학자 홍이섭(洪以燮)이 지적했듯 월남의 성격과 행동은 시대적으로「개혁을 위한 저항」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전기적(傳記的)으로 서술하기는 벅찬 일임에 틀림없다.
지금,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숨가쁜 역사의 분수령 속에서 우리는 또다른 월남을 가질 수 없는 가
「…신(臣)은 비록 만번 주륙을 당할지라도 이런 매국의 도적들과는 조정에 같이 설수 없사온 즉, 폐하께서 만일 신이 그르다고 생각 하시면 신의 목을 베이사 모든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만일 옳다 여기시면 모든 도적의 목을 베이사 온 국민에게 사례를 하소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날 고종(高宗)은 이상재를 불러 의정부 참사관을 명했다.
을사조약 체결되자 관직사퇴… 국민계몽 앞장
그러나 이상재는「어명」을 거역하고 단호하게 물러설 뜻을 밝혔다.
1894년 월남이 학부(學部)학무국장과 관립외국어학교교장을 겸임하며 민족을 이끌어갈 동량을 키워나갈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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