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李相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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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李相龍) 선생
1858. 11. 24~1932. 5. 12

낙동강의 물줄기가 그 유장함과 깊이를 더해가는 경북 안동의 고즈넉한 언덕에 자리한 임청각(臨淸閣)은 2년전인 1990년 자신의 옛주인을 맞아 방문객으로 분주한 적이 있었다.
일제 당시 독립운동계의 거목이며 임청각의 주인인 이상룡(李相龍)선생(본명 象羲, 호는 石洲이다)의 유해가 중국으로부터 봉환되었던 것이다. “슬퍼말고 옛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는 고별시를 남긴채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을 떠난 지 실로 79년만의 소리없는 귀국이요, 귀가였다.

“무력으로 독랩쟁취”만주항일투쟁 이끌어

선생은 1958년(철종 9년) 음력 11월 24일 경북 안동에서 이승목(李承穆)과 부인 권씨 사이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영남학계의 거유(巨儒)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사사하며 명가의 후예이자 정통 유학자로서 손색없는 학문적 수업을 닦았다. 당시 제국주의 열강은 조선에 서시히 침략의 촉수를 뻗쳐오고 있었으나 그런 속에서도 임청각의 서재에 묻혀 벗삼아 생활하던 선생의 청년기는 비교적 평온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하여 외숙인 권세연(權世淵)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진, 행동하는 척사유림(斥邪儒林)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선생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눈뜸과 참여는 1905년 을사조약을 맞아 1만5천금을 투자, 가야산에 군사기지를 설립코자 하는 계획으로 계속 되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선생은 무기의 열세, 근대적 군사훈련의 부족 등으로 인한 의병의 한계를 자각하고 구국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때마침 인근지역의 유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등 혁신 유림적 인사들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워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자 이에 합류하여 칸트․홉스․루소․부른 출리 등 서구근대사상의 비판적 검토를 통한 1907년경 계몽주의자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선생은 5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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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