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열투쟁의 시도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는 특별히 배일사상을 갖고 있지 않던 안중근은 전쟁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한 것이 결코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한국을 병합하여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것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당시 ‘결사 부하’ 50명을 거느리고 있던 안중근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보안회 사무실을 방문, 한국 침략의 선도자 하야시 곤스케 대리공사와 부일배는 처단하는 ‘의거’를 제안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이 같은 사실은 안중근이 나철 등의 을사오적 처단 시도에 앞서 한국의열투쟁사의 효시를 개척한 장본인임을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2) 해외 국권회복운동 시도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한국병탄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끝내 국외 이주를 결심하게 된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일제에 의한 한국침탈의 부당성을 호소하면서 문명국가들로부터의 군사원조를 기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하이와 산둥지방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모아 본격적인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 거주 한인 유력자들과 친분을 가진 천주교 신부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했다. 그 무렵 안중근은 대한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프랑스 선교사 르각을 만나게 되었다.
일제의 한국 침탈에 직접 항거하기보다는 진정한 실력양성의 방법을 권유하는 르각 신부의 말에 크게 감동하였다. 결국 1905년 12월에 상하이 이주를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3) 애국계몽운동으로서의 교육사업
안중근은 1906월 3월부터 1907년 7월까지 약 1년 5개월동안 애국계몽운동에 열정적으로 투신하면서, 교육운동과 결사운동, 그리고 식산진흥운동 및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