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회의 시작과 더불어 소속감과 상호보호의 정신은, 약한 인간을 지배하려는 이기적 욕망만큼이나 영향을 미쳐왔다. 상부상조는 적에 대해 가족과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특히 가장이나 족장의 역할은 주로 야생동물이나 자신의 적에 대해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상호보호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였다.
종교적 차원의 사업들이 조직화됨에 따라서 목사가 과부와 고아, 병자를 보호하는 일에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종교적 신앙심이 자비와 자선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는데 고대의 종교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개념에서 불행에 처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중요한 종교적인 의무였다.
이러한 자선은 처음에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 조직화되었다. 기독교가 국교로 받아들여지고 교회의 영향력이 증가함에 딴라 수도원 내에 빈민을 위한 시설이 설립되었다. 이것은 고아원, 노인, 병자, 장애자를 위한 집, 그리고 집이 없는 사람을 위한 피난소였다. 특히 성 프란시스가 창설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는 전도, 자선금 모금을 하여, 빈민구제를 했다.90) 이런 상황에서 전 유럽에서는 구걸하는 사람이 늘어났는데 자선금을 요청하는 것은 생활영위의 쉬운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았다. 왜냐하면 자선금은 전도사, 수도승, 대학생 그리고 성지로 가는 십자군에게도 할당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자선을 장려했지만 국가는 교회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800년에 샤를마뉴(犬希)의 법령으로 정부 당국은 구걸행위를 금지하였고 일할 수 있는 구걸자에 대한 자선을 베푸는 시민에게.벌금을 부과하였다. 이 법령이 제정된 것은 노예와 농촌 근로자를 영지에 머무르게 하고 농민과 여행자를 방랑걸인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와 정부의 이와 같은 갈등은 중세 말까지 계속되었다.
자선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수도원과 수녀원 등 딴은 교회 시설의 일부가 병자, 고아, 기아, 임산부를 위한 병원으로 대체되었다.
귀족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이런 병원은 중세기에 있어 자선을 베푸는 시설이 되었으나 일부 빈민만이 휴식처로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거리에는 유랑하는 많은 걸인이 있었으며, 지방정부와 주정부는 이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걸인에 관한 이념상의 차이는 교회 시설과 병원의 부실운영, 자금의 남용에 관한 통제수단에 비판을 가져와 중앙정부는 감독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갈등은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에 더욱 격렬하였다. 독일의 루터(Luther)는 구걸은 금지되어야 하며, 그 대신 모든 교구에 빈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