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어도(釣魚島) 분쟁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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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어도(釣魚島) 분쟁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
조 어 도(釣魚島)

1.조어도(釣魚島) 분쟁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들

1) 중국 측의 기록들
명나라의 시조(始祖)인 홍무제(洪武帝)는 유구열도를 중국에 복속시켰고, 명조와 청조에 걸쳐서 중국은 유구(流球)왕국의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견지하였다. 유구(流球)국의 역대 왕들은 중국 황제의 재가(裁可)를 얻어서 왕위에 올랐고, 그들은 중국에 조공(租貢)을 바쳤다. 중국과 유구와의 이러한 관계는 1879년 일본이 유구(流球)국을 복속(服屬)시킬 때까지 약 500년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중국 황제는 24명의 사절을 유구에 보낸 바 있는데 이들은 중국에 돌아와 황제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기록들에서 조어도(釣魚島)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조어도(釣魚島)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1403년에 나타난다.
1534년에 유구(流球)를 다녀온 여행보고서에서, 5월 11일 저녁, 우리는 유구(流球)에 속해 있는 Kumi섬을 발견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섬은 조어도(釣魚島)로부터 150해리 동쪽에 위치한 섬이다. 이 기록으로 유구(流球)열도는 조어도(釣魚島)가 아니고, Kumi 섬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1559년 중국 사절의 여행 보고서에서 일본까지 가는 항정(航程) 중에 있는 중요 섬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는 특히 조어대(釣魚臺)섬이 중국에 귀속(歸屬)된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1556년 중국은 그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倭寇)를 응징하기 위하여 토벌군을 조직하였고 이들의 작전 개념 속에서 조어도(釣魚島)는 중국 측 해안방어구역 범위 안에 속해 있었다. 1561년에 발간된 일본의 지도에서도 조어도(釣魚島)를 명(明)나라 해안방어구역 범위 안에 넣고 있었다고 한다.
청(淸) 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유구(流球)국 사절(使節)의 기록들에서는 조어대(釣魚臺)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발견된다. 1831년 유구(流球) 사절(使節)의 공식 기행문에는 오끼나와 해구(海溝)가 중국과 유구(流球)의 경계가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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