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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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드골주의

프랑스 정부는 2차대전이 끝나자 국민화합과 민족정기 수립 및 사회정의 구현차원에서 나치스 협력자 및 비시정권 참여자들을 사법의 심판대로 올려 처벌함으로써 한점의 의혹이 없이 터파했다.

프랑스 드골 장군은 나치협력자 처리 전담 재판소를 두어 나치협력자 200여 만명을 법의 심판대 위에 세워 프랑스 국민에게 공개했으며 그중 20여 만 명에게 사형 및 강제노동, 징역형, 전 재산 몰수 및 공민권 박탈 등을 선고해 사실상 프랑스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시켰다.

프랑스 반역자 숙정은 3 종류의 특별법원에서 처리되었으며, 비시정권 아래에서 장, 차관이나 고급 공무원을 지낸 자는 탄핵재판소에서, 언론인 작가 등의 문인은 전국에 분산되어 있는 특별법원에서, 그외 죄상이 경미한 협력자 및 반역자들은 최하위 공사(公事) 재판에서 처리했다.

특히 당시 협력 언론인 행적을 추적한 프랑스 전국작가위원회(CNE)는 숙청대상 언론인 148명을 선정했으며 그중 93명이 중형으로 처벌되었다. 잡지 토「오토」의 사주이며,「쁘띠 니소와」를 비롯 여러 지방신문을 거느린 신문재벌 알베르 르죈느는 1944년 10월 20일 , 특별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최초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리스티드, 브리앙 등 유명 정치인 전기작가로 파리 언론계에서 필명이 널리 알려진 조르주 쉬아레즈 역시 1940년 12월 「오쥬르뒤」紙 주필로 임명된 뒤몇주 사이에 친 독일 논조로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1944년 10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했다.

친독 신문, 잡지에 친독 기사를 실었던 35세의 젊은 언론인 로베르 브라지야수 역시 1944년 6월 16일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으며, 우리의 모 윤숙이나 김 활란, 이 광수, 김동환, 최 남선 류에 해당하는 인물인 독일 선전방송을 한장 에롤드 역시 45년 10월 11일 샤티용 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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