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적 독자를 위하여
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옛날부터 인문교육의 대상으로 자리잡아 오고 있다. 동양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자가 쓴 공자어록의 <不學詩면 無以言>1)1) 不學詩면 無以言이라: 시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말할 게 없다.
라는 말과 서양을 대표로 19세기에 매슈 아널드가 이야기한 <시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발언>이라고 하는 말은 둘다 시를 배우는 것이 말을 배우는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시가 말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詩는 인간이 문자를 쓰게 되면서부터 우리의 생활과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다시 이야기해서 삶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그런 것이 되어왔다. 또, 시는 광의 적으로 정서교육에 효과적이다. 이러한 생각은 <온유하고 돈독함은 시가 가르치는 바(溫柔敦厚詩敎也)>2)2)『禮記』「傾駭」.
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건 동양에서건 詩는 언어의 정수이기 때문에 시의 이해는 언어의 이해가 되고, 나아가 언어동물의 이해가 되는 것이다. 또, 詩는 즐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준다는 사실도 동․서양 모두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특이할 만 하다.
하지만, 최근 그렇게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시가 널리 수용되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원래의 깊이에서 향수되고 있지도 않는다. 그것은 여러 곳에서 기율이 사라지고 뛰어난 것에 대한 경의가 사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古典을 통한 시적 감수성의 훈련’이 최근들어 강조되고 있다. 최근의 시에 대한 경시 풍조가 시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는 동․서양 고전 모두와 격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데 따른 것이다. 우리의 얼마되지 않은 근대시의 유산은 제대로 연구되고 있지 않고, 번역을 해 버린 서양의 시 역시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언어의 정수를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심각성은 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