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이들만을 위한 천국―여기에 또한 원장님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모습의 철조망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 있는 문둥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청준(57)씨의 장편 <당신들의 천국>은 유토피아의 본질과 한계를 문제 삼는다. 아니, 이 소설에서 유토피아는 본질적으로 한계를 수반하는 얼치기 유토피아, 그러니까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렇다는 것은 천국'의 주체가 우리들'이 아닌 당신들'이라는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라 당신들의 천국'인가 이 물음에는 이 소설의 야심만만한 문제의식과 작가 이청준씨의 세계관의 무게가 함께 걸려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를 무대로 삼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5․16 쿠데타가 있은 지 얼마 뒤 군복 차림으로 소록도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해온 조백헌 대령. 그가 나름의 열의와 진정을 지니고 소록도를 나환자들의 천국으로 꾸미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우여와 곡절이 소설의 대략적인 얼개다.
앞머리에 인용한 글은 조 원장 아래서 보건과장으로 봉직했다가 섬을 떠난 이상욱이 조 원장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상욱은 나환자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조 원장의 포부와 실천을 처음부터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조 원장이 행동의 인간이라면 상욱은 관념의 인간이다. 조 원장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현실적 능력과 기반을 지니고 있다면 상욱이 자신을 구현하는 방법은 부단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