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70)씨의 대하소설 <토지>는 농민전쟁과 갑오개혁, 을미의병 등이 차례로 근대사의 연표를 채우고 지나간 1897년 한가위로부터 문을 연다. 이후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지배와 민중의 검질긴 독립투쟁, 그리고 2차대전에 이은 해방까지의 긴박한 역사를 큰 호흡으로 훑어내려갈 소설의 첫 장면은 뜻밖에도 평화롭고 풍요롭다.
귀신사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양귀자 숨은 꽃')
소설가 양귀자(41)씨의 중단편 숨은 꽃'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의 귀신사를 무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귀신사에 귀신사는 없다. 전주에서 모악산의 서북쪽 허리를 딛고 지나는 712번 지방도로를 30분 가량 타고 달리면 이르게 되는 청도원 마을 앞에는 국신사(國信寺) 입구임을 가리키는 팻말이 서 있다. 절 뒤편 팻말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절의 이름은 국신사 구신(狗信)사 구순(狗脣)사 귀신(歸信)사 등으로 다양했지만, 귀신(歸神)사로 불린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작가는 돌아가 믿는다'는 뜻의 귀신(歸信)을 신이 돌아온다'는 뜻의 귀신(歸神)으로 잘못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1992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숨은 꽃'은 작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일종의 소설가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뜻대로 글이 써지질 않자 머리를 식힐 겸 여행에 오른 길이었다. 작가가 여행길에 오른 것은 전교조 원년의 투쟁을 그린 단편 슬픔도 힘이 된다' 이후 3년만에 쓰는 단편이 시작부터 미로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3년이라는 공백기간이 작가의 손을 굳게 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