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사상이 중국의 사상사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고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으로 본격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한(漢) 나라에 이르러서였다. 한 나라에 앞서 진(秦)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시대를 종결시켰을 때만 하더라도 정치적 통일이념은 오히려 법가(法家)의 사상에 의존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은 기원전 221년에 천하의 봉건국가들을 평정한 후 통일국가의 운영을 위하여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필요로 하였다. 그가 등용한 재상인 이사(李斯)는 한비자(韓非子)와 더불어 법가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자로서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입국정신에 부응하기 위하여 법으로써(예로써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진 나라는 법치국가로서 출발하면서 법제를 마련하고 법령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사와 한비자는 본래 순자(荀子)의 문하생들이었다. 그들은 진시황에 의한 정치적 통일에 만족하지 않고 사상적 통일을 함께 기하고자 하여 기원전 231년에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진 나라의 역사책이 아닌 모든 서적을 불에 태워버리고 수많은 학자들은 살해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학식이 높은 학자들이 아니라, 선술(仙術)을 닦아 재물을 거두어들인 술사(術士)들이었다고도 한다. 진 나라는 15년만에 망하였지만 정치적-사상적 통일은 한 나라를 그 다음으로 하여 이어지는 통일중국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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