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단의 배경
독일의 분할은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부터 연합국측에 의하여 많이 논의되었고, 또 많은 분할안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전후 독일을 분할한다는 데는 원칙적인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 했다. 또한 전후 독일문제와 나아가서 유럽의 신질서형성에 관해 상이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과거의 적이었던 독일을 자기의 영향권으로 넣어보려는 노력은 점차 노골화되어 갔고, 미․소를 주축으로 하는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부터 독일문제는 동서랭전체제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후 전후의 독일문제에 관한 정상급 지도자들의 최초의 회담은 1943년 11월에 개최된 테헤란회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은 독일의 해체문제를 토의하는 데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 하였다.
1945년 2월 크리미아반도의 얄타에서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은 삼국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얄타협정에서 결정된 중요사항은 독일의 분할점령확인과 4대국공동관리위원회를 베를린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얄타성명서는 독일의 군국주의와 나치즘을 파괴하여 독일이 다시는 세계평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는 것이 3개국 정상의 불굴의 의지임을 선언하고. 독일군대의 무장해제와 해체, 독일인의 파괴에 대한 실물배상요구을 명시하였다. 독일군의 무조건 항복후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의 4개국은 ‘베를린 공동선언’을 통하여 독일의 최고통치권을 인수하였고, 베를린시의 공동관리를 위해 연합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연합국의 독일점령정책은 포츠담회담에서 결정된 기본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이 점령정책은 편의상 4D정책으로 부른다.
이데올로기와 사회체제를 달리하는 미국과 소련간에는 전후 독일문제의 처리과정에서 대립이 격화되어 포츠담회담에서 결의된 연합국공동관리위원회를 통한 공동통치가 어렵게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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