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일정한 한도내에서 자기조정 능력이 있다.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양립할 수 없는 생태주의자들의 선택은 자유주의적 내지는 자주관리 사회와 양립할 수 있다. 자연의 자기조정 능력을 파괴하는 현재의 자연에 대한 착취적 관계를 그들은 비판하고 있다. 생태주의자들은 희소성, 공해, 과밀과 막다른 골목에 이른 문명에 대한 해결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성장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의 제한 내지 감소 속에서 구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태학은 자연의 축적물을 개발, 이용하기보다는 제한 내지 절약하는 쪽이, 그리고 자연의 순환에 간섭하기보다는 그것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유리하며 또 생산적 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공생의 세계를 말한다. 중앙집권적이 아닌 자주적인 관리, 스스로의 자율적 통제가 생태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공생의 사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나키스트와 닮아있다.
자본주의에서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생산자와 생산물에 대한,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개인의 집단과 국가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를 반영하며 (역)규정하기 때문이다. 실로 기술은 권력관계, 생산을 위한 사회관계, 그리고 노동의 위계적 분할의 원형이다.-그러나 이 말속엔 ‘기술’ 자체가 바로 이런 사회적 생산관계, 권력관계, 노동관계의 산물이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기술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아니었으며, 반드시 유효한 것도 아니었다. 자본주의는 그 논리에 적합하고, 그것이 지배와 양립하는 기술만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도달해야 할 목표에서 볼 때 보다 합리적인 기술조차 현행의 사회관계를 강화시키지 않는 경우에는 배제시켜 버린다.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와 교환관계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전해준 기술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을 위한 투쟁 없이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은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