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에 이르러 조선봉건사회는 발전기에 들어섰다. 고려왕조는 정치, 경제, 군사의 여러 가지측면에서 봉건제도의 강화하기 위한 열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관제를 비롯한 정치제도가 완비되어 갔고 토지 및 조세제도와 군사제도도 자기면모를 완전히 갖추게 되어갔고 봉건문화는 세계적 이름을 떨치게 되였다. 발전기 조선봉건사회의 토지제도에서 표현된 주요한 특징은 첫째, 지주적 토지소유가 발전하고 소작제도가 보편화 되었다는것, 둘째, 토지를 통한 수탈제도도 완비되어 전조 수탈에 의거하여 유지되고 모든 국가기구와 관료, 아전들을 위한 각종 명색의 토지 수조지들이 최대로 팽창하였다는 것, 셋째로 토지소유관념이 발전하여 통치배들도 소유와 점유의 계선을 명백히 가르게 되었으며, 넷째로 공동체적, 노예소유적 토지의 유제들은 현저하게 사멸되고, 소농민적 토지소유는 봉건국가와 지주의 2중적 중압속에서 간고하게 그러나 강하게 보존되면서 성장발전 하였다.
본론
[1] 고려왕조의 회유정책, 녹읍과 식읍제도와 실시
895년에 궁예가 태봉국을 세웠고 견휜이 892년에는 후백제를 세우면서 신라는 지방정권이 되고 말았다. 개성지방세력이건 왕건은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세운 후 926년 이후 발해의 일부를 지역통합하고 935~936년에는 신라와 백제를 투항시키면서 조선반도에는 고려왕조에 의해 통합되었다. 왕건이 통일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민들의 강렬한 염원과 현실적인 정치, 경제적 정책의 결과라 하겠다. 일단 세금을 10분의1세로서 전면적으로 감액하고 지방할거세력(귀순한 성주, 장군, 관료 등)에게 높은 벼슬과 함께 본래통치지역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던 포섭정책과 생활고를 겪는 자들을 위한 정부적인 지원-바로 이러한 유화정책-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포섭정책과 유화정책들 사이에 녹읍과 식읍을 주어 벼슬하는 자들과 인민들을 정착시켜 물질적인 기초를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