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학에도 학생회가 있었다
우리가 다니고 있는 성균관은 600년의 전통을 가진 매우 전통 있는 대학이다. 고려말부터 지금까지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학교에 있는 문헌들을 정리하여 예전의 대학생활이 어땠을 지의 가상모델을 만든 역사스페셜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부분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우선 그 당시에도 얼마나 엄한 교육을 시켰을 지 알 수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세운 나라이기에 새로운 통치이념이 필요했고 조선은 유학을 선택하였다. 새로 건국된 나라에 등용할 인재들을 직접적으로 양성하는 기관 이였기 때문에 더욱 스파르타식으로 엄격한 관리를 하였다. 성균관에는 도기( 식사 때마다 서명하는 출석부 )가 있어서 원점제도에 의해 아침저녁식사를 다 해야 1점을 주는 방식에서 300점 이상이 되어야만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이 제도의 목적을 보면 근면한 태도를 기른다는 인간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에 전국의 인재들을 서울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기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예외로 인정해주던 (70세 이상 노모가 있거나 상을 당했을 경우) 경우를 악용하거나 대리서명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의 우리 대학생들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는 대리서명과 더불어 “동방록” 이라는 것이 있어서 요즘의 “날쩍이” 와 같은 학생문집역할을 하였다. 고시생들이나 선배들이 취업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처럼 그때도 과거급제가 어마나 절실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들도 있다. 성균관에서 학문수련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과로로 죽는 사람들도 있었고, 부담을 이기지 못해 컨닝을 하기도 하였는데, 논어 각 장의 첫 구절들이 대나무에 작게 써있는 죽통을 땅에 묻거나, 작은 컨닝페이퍼를 붓통이나 심지어는 코 안에 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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