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석(南石) 안수길은 1911년 함남 함흥시에서 간도 용정 광명 고등여학교 교감을 지낸 안용호씨와 김숙경 여사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6세때 흥남리 서호리로 이주하여 유년시기와 소년시기를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이곳이 원적(原籍)으로 되어 있다. 1924년에 소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 관여하여 3년 전에 먼저 간도로 간 아버지를 찾아간다.
1926년 함흥고보에 입학, 2년 재학중 맹휴사건이 일어나 주동학생으로 인정되어 자퇴했으며, 1928년 상경하여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그러나 이듬해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항쟁의 선두에 섰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5일간 구류생활을 치른다. 이것을 빌미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양양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의예과를 치르라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동경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일년도 안 되어 집안의 우환과 학비 관계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학비를 벌어 공부하기 위해 용정에서 떨어진 팔도구에서 소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던 남석은 건강을 해쳐 1933년 여름 그 학교를 떠나 고향 함흥으로 돌아와 석왕사에서 요양하였다. 요양중 대문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문학도 남아 일생의 업이라는 확신을 얻고 그 이후 문학에 전념키로 한다.
1935년에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조선문단』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적십자병원장」은 검열로 발표되지 않고 다만 콩트만이 실렸다. 이 해에 소학교 동급 동창인 김현숙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학원 선생이었으며, 그녀의 호의로 일본 잡지 『문예』를 구독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해에 박영준, 이주복, 김국진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북향(北鄕)』을 간행하였다. 1937년 용정의 우리말 신문 간도일보와 신경의 만몽일보가 병합되어 만선일보로 발족하자 신경으로 가서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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