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대동창의단 조직 의병장으로 활동
․1910년 대구감옥에서 사형 순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사람이란 어차피 한번 죽고 마는것이니 왜놈과 가까이해서 죽게 될진데 어찌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는냐.
於彼於此期爲一死乃己
則與其役於倭類而致死
曷若役義而死
死不失令名哉
-「全海山陣中日記」(1908) 중에서 -
1879년 10월 18일(음) 전라북도 임실군 남면 국화촌(菊花村) 호전동(狐田洞)에서 부친 전병국(全炳國)과 모친 경주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며 휘(諱)는 기홍(基泓),자(字)는 수용(垂鏞),호(號)는 해산(海山)이다. 선생의 가문은 양반이었으나 조선시대 계유정란(癸酉靖難(1453)이 일어나자 전라도 진안에 내려와 정착하였고 그 이후 수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향반으로 남아 빈한한 가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은 불의를 보면 의기가 북받쳐 분개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게 가경(家耕)에 종사하는 한편, 당천(唐川) 이한용(李漢龍) 문하에서 학문을 틈틈히 연마해 사장류(詞章類)(詩歌와文章)의 학문에 영특함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한용은 영남의 거유(巨儒)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그 부근 고을에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그가 인근의 양반 자제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자 선생도 그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닦고 원근의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유학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심취했던 것은 의리와 명분을 양대 지주로 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었으며 월남 망국사(越南亡國史)와 같은 외국 역사와 관련된 사학(史學)에도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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