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孫秉榎)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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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孫秉榎) 선생
손병희(孫秉熙) 선생
1861. 4. 8~1922. 5. 19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거사를 앞두고 천주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쇠퇴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의암 선생이 설파했던 이 다짐이 오히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욱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난의 일제시대에 천도교 제3세 교조(敎祖)로서 당시 최대의 종교단체를 이끌어 온 선생의 생애는 바로 우리민족 저항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만세 불러 독립 일깨우자” 3․1독립운동 주도

선생은 1891년 4월 8일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여 청년시절 한때 서자(庶子)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한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가 1882년 동학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동학 제2세 교조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으며 이후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갔다.
입교 10년만인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자 일약 호서지방을 중심한 북접(北接)의 통령(統領)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동학혁명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기에 이른다. 선생이 이끄는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전봉준과 남접군과 함께 남북접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남북접연합군은 일본군의 불법개입으로 인해 공주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동학혁명운동의 열화같은 의지는 좌절되고 선생은 원산․강계 등지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7년 해월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조로 취임하여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다가 1901년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가 선생에게는 새로운 의식의 전환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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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자료
출처: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