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 그것은 완벽하게 ‘그렇다’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예술에 관심과 흥미가 있다고 대답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이다. 난 예술을 접할 때 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부분에서의 감정이나 하나의 문제적 발단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그에 따른 공감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얻는 공감대는 내가 격어보지 못한 부분에서 얻는 부분이기에 이것이 진실한 공감인지 억지 공감인지는 구분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술의 하나인 소설에서의 내용이 풋사랑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미성년의 여아를 살해하는 내용일 경우 난 이것의 소설적(문화적) 내용에 공감을 느낀다. 이것은 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한 공감이 아닌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그 상상력과 그들이 그 정도로 그것을 아끼고 싶다는 그 애절함에서 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어려운 예술에 대해 (이를테면 미술작품) 공감하기 어렵다면 그 예술의 경우 보통은 창고 한구석으로 가거나 공원 한 편에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인류의 첫 예술이 동료들(당시에는 동물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면 그들 간에 공감대가 필요로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룡을 잡고 싶은 유인원이 할 수 있는 표현은 부족하고 오로지 그림으로만 자신의 내용을 표출하고자 할 때에는 상대방도 그 공룡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고 나 또한 그 공룡의 생김새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상대방이 공룡에 대해 모른다면 그것의 실재크기나 위험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 알 수 없기에) 사냥을 제안했던 유인원의 공감은 실패로 돌아서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은 초록색 물체라는 것이 공룡이란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데 사냥을 제안했던 유인원의 머릿속에 있는 공룡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공룡이었고 그 물체가 송신자와 공감되지 않는다는 것도 또 다른 공감의 실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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