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근대초기란 영조 원년(1725년)부터 순조(1801년) 이전, 곧 영?정조대의 75년간을 두고 일컫는다. 물론 근대 문학의 기점 문제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다소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이 시대에 이르러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일게 되고 서민 정신이 싹텄음을 부인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소설의 기점에도 이론(異論)이 다소 있긴 하지만, 18세기 영?정조대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치,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실학이 등장하였고, 자본주의의 맹아, 신분제도의 붕괴, 서민의식의 성장 등이 나타났고 또한 영조는 등극하면서부터 붕당, 사치, 금주라는 삼조(三條)의 계서(戒書)로 선정을 시작했으며, 더구나 그는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데서 신분 제도의 붕괴 등과 같은 그대적인 사고를 더욱 고취시켰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 략>
<허생전>과 유사한 이인설화들이 여러 편 문헌에 전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식보기허생취동로(識寶氣許生取銅爐)>, <영만금부처치부(瀛萬金夫妻致富)>, <안빈궁십년독역(安貧窮十年讀易)>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개 독서만 일삼던 가난한 선비가 굶주림에 지친 처로 말미암아 가출한 후, 이름난 부자를 찾아가서 돈을 빌려 그 돈을 크게 불려서 부자에게 모두 주고 자신은 빈 손으로 귀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호질』은 우언(寓言)으로서 대화 형식에 의해 서술자의 의도를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박지원은 "후지"에서 이 글은 근세 중국인이 비분강개하여 지은 것으로서 청조(淸祖)의 위선적인 정책과 그러한 청조에 곡학아세하며 일신의 안주를 추구한 한족(漢族) 출신 유학자들에 대한 풍자 및 비판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시 우리 나라 유학자들의 곡학아세와 조선후기 사회의 모순에까지 미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