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형제의 개혁으로부터 로마 공화정의 몰락까지의 로마사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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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형제의 개혁으로부터 로마 공화정의 몰락까지의 로마사 흐름
그라쿠스형제의 개혁으로부터 로마 공화정의 몰락까지의 로마사 흐름

1. 그라쿠스형제의 개혁 (BC 133~121)

BC 133년에 호민관으로 뽑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공유지 면적을 500유게라(약 1,214㎡)로 제한하는 법안을 내놓아 나머지 국유지를 땅이 없는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다. 대토지 소유자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이에 반대하자 그는 평민회에 법안을 직접 제출했다. 그러나 귀족 편으로 기울어진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평민회는 그라쿠스의 주도 아래 옥타비우스의 호민관직을 박탈했는데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뒤 더욱 강경한 내용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원로원파는 평민회의 개표 장소로 몰려가 티베리우스를 살해했고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뒤따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가 시작한 개혁은 계속되었고, 시민들이 갖고 있던 초과 공유지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자 시민이 아닌 이탈리아인들이 점유한 공유지까지 분배 대상이 될 위험에 처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에 항의했고 개혁파는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좌절당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BC 123년 호민관이 된 뒤 전반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공공수입을 늘려 그 혜택을 인민에게 돌리려 했고, 한편 에퀴테스에게 아시아 속주의 주요세금을 거두는 책임과 행정관의 부패를 다루는 특별법정을 맡겨 원로원을 견제하려 했다. 그는 2번째로 호민관직에 오른 뒤 더 많은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이듬해에는 호민관 선거에서 졌다. 그는 BC 121년 무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준비하던 도중에 폭동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인민을 위한 많은 법안들은 대부분 철폐되었으나 에퀴테스를 위한 규정들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2. 공화정 (BC 121경~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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