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경우 산업혁명의 확산이 서구권에서 제일 늦었다. 따라서 토지중심의 융커 세력의 독점현상이 지속되는 전통적 계급사회였다. 근대자본 형성도 늦어지고 보수 권위주의적 지방분권적 정치영향으로 공업화, 기계화에서 오는 변동도 기피 또는 저해하였다. 자본과 기술에 자연발생적 성장이나 개발이 지연되고, 자연히 외부로부터의 자본유입도 늦어졌다.
프로이센의 초기 산업화과정에서 사회 정책적 사업은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 하에서 크게 진전이 없었다. 이시기에 비스마르크가 수상으로 부상한다.
비스마르크의 등장과 헌법투쟁에서의 승리는 프로이센에서의 자유주의 발전을 중단시켰다. 그래서 19세기 중반까지의 독일정치의 특징은 보수권위주의 가부장적 보호전통이 유지되는 정치적 후진국 상황에서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통일은 후진국에 선진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신흥자본주의국가로 전환하여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국내적 요인과 국외적 요인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외적 요인은 보불전쟁의 승리로 전쟁배상금 50억 프랑과 자원의 무상도입으로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된다. 즉 전쟁배상금은 독일 금융자본시장의 유인자금이 되어 철도 및 중공업 육성자본으로 충분했고, 프랑스의 유지 발전을 위한 모든 정치적 노력은 그와 직결되었다. 그리고 알사스 로렌 두 주를 무상으로 받아 산업자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다. 이에 후진국 경제상황을 면치 못하던 독일의 외부로부터 온 호조건이었다.
둘째, 국내적 요인인 종래 자유방임주의에서 1878년 비스마르크는 보호관세를 재정해서 국내제조업과 산업자본을 보호 육성했다. 또한 식민지 경영정책을 써서 독일 경제력신장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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