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는 실제로 뮌헨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성장하여 늘 뮌헨을 제 고장처럼 생각했다.
우리에게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는 놀랄 만한 창조력을 지닌 인물, 우리가 그의 아들에게서 다시 발견하는 성질인 “행복한 내적열광”과 “변함 없는 낙관주의”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극단적으로 전문성을 추구하는 경향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로서,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는 모든 개별 관점들을 종합함으로써 그의 가장 훌륭한 결론에 도달했다.
어렸을 때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선생님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긴 학생이었고, 이때부터 강한 명예욕이 그의 특색이었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하이젠베르크는 많은 정신적 자극을 소화했는데, 그에게 플라톤 철학보다 더 강한 인상을 준 것은 없다. 이것은 특히 그의 후기 연구 ‘물질의 통일장 이론’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이젠베르크는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났는데 거기에 훌륭한 교수였던 좀머펠트를 만나게 되어 그의 천재성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평생을 동반하게 된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파울리를 만나게 된다.
원자물리학자들에게 1922년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사건은 6월의 이른바 ‘보어 축제’였다. 이것은 보어가 괴팅겐에서 했던, 원자의 양자 이론과 원소의 주기율에 관한 연속 강연을 말한다. 또, 이자리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하나의 스승이 된 보어와의 만남을 갖게 된다.
예상밖으로 하이젠베르크는 졸업시험을 간신히 통과하게 된다. 이유인즉슨 그당시에는 실험물리와 이론물리를 묶어서 시험을 보았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실험물리에 관심이 없어 이론물리만을 가지고 간신히 졸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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