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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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사건
천안문 사태

1989년은 중국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위경생 수감 10주년,중화인민공화국 수립 40주년, 5․4 운동 70주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등소평이 개혁과 개방정책을 실시한 지 10년이 지난 해였다. 또한, 개혁개방이 불러일으킨 각종 인플레와 관료의 부정부패는 서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이러한 중국사회의 팽팽한 긴장감은 4월 15일 호요방의 사망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호요방에 대한 평가논쟁으로부터 시발된 민주화시위는 정부당국에 의해 [동란]으로 규정되어졌으나 계속해서 확산되어 갔으며, 6월 3일 밤에 비로소 천안문 광장에 중국군의 진입이 시작되어 6월 4일에는 수많은 중국인민이 무차별 발포로 사망했다.
그러나, 천안문 사건은 지금까지도 많은 문제점을 남긴 채 미해결로 매듭지어졌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뒤 중국에서는 후계자 문제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정치안정을 유지하고 지속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두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현실에 봉착해 있다.

Ⅰ. 6․4천안문 사건의 발발 원인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극도로 낙후 되었던 중국 경제는 등소평이 재등장하면서 생산력 발전에 촛점이 맞추어진다. 등소평이 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표방한 이후 중국 경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나, 그 이면에는 개혁개방이 일으킨 폐해 또한 심각하게 누적되고 있었다.
지도층간에는 개혁개방의 심도와 속도를 놓고 이견과 권력투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급격한 경제개혁으로 민간영역의 경제에 관한 자율성은 증가하였으나 여전히 중요 경제 자원의 배분에 있어서는 관료들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관료들은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이용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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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