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의 역사는 일반 도시 국가들의 정치 발전 양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스파르타인은 다른 그리스인과 같은 혈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실패했다. 스파르타 정부는 오늘날의 엘리트 독재와 비슷한 형태로 발전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스파르타는 기원전 6세기 이후로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원인의 일부는 고립에서 찾을 수 있다. 북동부와 서부가 산맥으로 둘러싸였고 좋은 항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스파르타인은 외부 세계의 진보적 영향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밖에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일반 대중을 도울 중간 계급이 성장하지 못했다.
스파르타인은 본래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에 침략군으로 들어온 도리아인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9세기 말에 이르러 라코니아 지방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인은 타이게토스 산맥 서쪽에 자리 잡은 비옥한 메세니아 평원을 정복하고자 했다. 결국 그 모험은 성공을 거두었고 메세니아인의 영토는 라코니아에 병합되었다.
기원전 640년경에 메세니아인들은 아르고스의 원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 발발한 전쟁은 그야말로 필사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스파르타의 본거지인 라코니아마저도 침략을 당했다.스파르타인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르고스의 사령관이 전사하고 호전적인 시인인 티르타이오스가 행한 애국적 탄원 덕분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승리자들은 반란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인들은 베세니아인의 토지를 몰수했고, 그들의 지도자를 살해 또는 추방했으며, 메세니아인을 헤일로타이(heilotai:노예)로 만들었다. 그후 스파르타는 방어적인 대외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메세니아 전쟁 이후 스파르타인들은 또다시 대외 전쟁을 하게 되면 헤일로타이에게 반란의 빌미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그들이 이미 획득한 영토를 지키는 데만 전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