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宗羲(1610~1695)의 자는 태충(太沖), 호(號)는 남뢰(南雷)로서 학자들은 이주(梨洲) 선생이라 일컬었다. 명 만력(萬曆) 38년에 태어나 청 강희(康熙) 34년에 사망하니 86세였고, 절강(浙江) 여요(餘姚) 사람이다. 그 부친 황존소(黃尊素)는 만력(萬曆) 연간의 진사(進士)로서 관직이 어사(御史)에 이르고, 동림당(東林黨)의 중요인물이며 명 희종(喜宗) 천계(天啓) 연간에 환관 당파 위충현(魏忠賢)의 모함을 받아 옥중에서 고문치사 당했다. 당시 황종희는 고작 17세로 부친의 명을 받들어 절동(浙東)의 대유학자 유종주(劉宗周)를 배알하여 스승으로 삼고 학문을 연구했다. 오래지 않아 희종이 요절하고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자 위충현이 세를 잃고 동림당인이 기용될 수 있었다. 19세의 황종희는 북경으로 달려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위충현은 이미 자살한 뒤였기 때문에 그는 분개하여 쇠송곳으로 위충현의 잔당을 찌르고, 마찬가지로 희생된 동림당인의 자제들과 함께 조옥의 중문이 제단을 설치하여 곡을 하니 그 소리가 천둥과 같았고, 궁중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또 환관파 한 사람의 수염을 뽑아 귀가하여 선친의 영전에 불살라 제사 지냈다. 나중에 숭정제가 환관을 다시 써서 환관파가 거듭 왕성해지자 황종희는 여전히 환관․집권세력에 반대하는 투쟁을 견지하여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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