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1969년 1월20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한번 더 수출전선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이 있던 시기였다.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회의록 내용. 68년도 지역별 수출목표 달성실
적을 분석해 보면 상주공관이 없는 지역의 수출이 오히려 잘되고 있습니
다.
…수출목표가 미달된 공관에는 경고장을 보내고 앞으로 인사에 반영토록
하겠습니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냉각됐다.
첫 회의라 상견례 수준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잖아 라는 긴
장의 빛이 참석자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해외공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한다면 하는' 朴대통령이 아니던가.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
소 고문) 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의 증언. 해마다 열리던 외무부 해
외공관장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보고사항은 주재국에 대한 수출실적이었
어요. 수출 성적표가 좋으면 유능한 대사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대사
는 정말 죽을 맛이었죠. 그래서 당시 대사를 '수출대사' 라고 불렀습니다
.
수출진흥확대회의는 65년 1월부터 매달 열리던 수출진흥회의가 확대
개편된 것이다.
4년만에 정계.관계.경제계.학계.법조계등 각계 주요 인사 1백명 안팎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로 탈바꿈했다.
朴대통령은 이 회의를 다목적용으로 활용했다.
민간학자들을 초청, 관료들로부터 듣지 못하는 바깥의 얘기를 듣는 한편
각계에 수출관련 긴장도를 전파하는 장 (場) 으로 삼았다.
또 대통령은 우리 편 이란 인식을 기업인들에게 심어줘 '수출 기업인
의 기 (氣) 살려주기' 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회의장에서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사람은 69년부터 74
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낸 남덕우 (南悳祐.72) 씨. 수출증진과 고도성장을
주문하는 朴대통령에게 기업인들은 항상 돈부족을 호소하게 마련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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